엄마,아부지!
오늘은 셋째딸 정자가 두분께 자랑이 하고 싶어요.
그런데 왜 눈앞이 흐려지지?
어느덧 회사를 다닌지 30년하고도 8개월이 되는데 우리회사는
노조가 없어 예전엔 일년에 두번씩 능력평가를 하고
거기에 비해 임금을 올려주곤 했었는데 이젠 그것도 일년에 한번씩이라오.
그 평가를 이번 화요일에 젊은 새 수퍼바이저와 면담을 하는데
느닷없이 정자 너는 겸손한 사람이야.
듣는 순간 이건 뭔소리 하면서도 버릇처럼 고맙다 하고 자리로
돌아와 생각을 하니 너무 기쁜거였어요.
젊은아이 그것도 이제 부임한지 10개월 밖에 안된 새내기 슈퍼바이저가
그렇게 평가를 내리다니!
엄마!
전요 능력평가에선 늘 인간관계인 공동생활에선 점수가 좋고
일은 잘 하는데 서류를 이해하는데는 점수가 낮아요.
그러나 불평하지 않아요.그것이 나이니까요.
이곳은 능력사회이니까요.
그래도 인격적으로 대해주는것만으로도 아주 기쁘답니다.
그러기에 평균을 점수하면 늘 중간에서 조금 높지요.
그런데 이번에 저렇게 이야기 해준것이 얼마나 기쁘고 보람이 있었던지요.
그러면서 두분이 생각이 났어요.
비록 가난하고 배우시지 못하시고 그렇다고 우리 가문은 이렇단다라고
해주시지 못하시는 양반가문도 아니였으니 가훈이라는것도 없이
그저 행동으로 가난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그토록 고생을 하시던 엄마의
꿋꿋하시던 모습들.
그런 와중에도 가훈은 아니지만 인간이 살아가며 갖추어야하는 덕목을
그저 속담정도로 간간히 적절한 일들에 한마디씩 해 주시던 그 이야기들을
저는 제 생활속에서 실천하며 그때마다 두분의 삶을 그리워했지요.
남의 이야기를 할라치면 두손을 배위에 얹기전에는 장담하지말라 하시던 말씀.
지금도 저는 누구와 앉아 이야기해도 험담을 하는것을 아주 조심하지요.
그래도 인간인지라 하고 나면 후회를 하고 반성을 하며 엄마의 조근조근
들려주시던 목소리에 죄송합니다 한다우.
직장에서도 종이장도 맞들면 이라시며 돕기를 마다하지 마시라던 그 말씀을
달려가 도와주며 엉터리영어지만 우리엄마가 이렇게 말씀 하셨다 하며
함께 들어주곤 하지요.
콩도 갈라 나누라시던 그 말씀으로 오후가 되면 지치는 젊은 아이들에게
사과 하나라도 깍아 조각을 내여 하나씩 입에 넣어주곤 하지요.
엄마가 예전에 알사탕 하나가 생기면 입에 넣어 어금니로 깨트려
아버지몫까지 골고루 손바닥에 펴놓으시고 갈라주시던데로.
가끔은 회사에 신용조합이라는 곳에 가 책상에 늘 있는
초코렛이나 사탕들을 얻으러 가면 이제는 봉투까지 내어주며
설합을 열어 골고루 넣어주는 관계로까지 이어져
떳떳히 얻어다 주곤 하지요.
가끔은 된장국과 김치 밥만 푸짐히 가지고 가 점심시간에 논아먹기도 하지요.
예전 엄마가 우리들 사는 모습이 엄마가 그렇게 알뜰히 사시던
시대에 비교하시면 이런 마음이 아니셨을까 하는 생각으로
내새끼나 남의 새끼나 요즘 사태가 집에서 음식을 안하고 그저
나가 외식하기를 좋아하고 모으려는 생각들이 없는것이 보이니 어느때는
주머니가 비여 제데로 먹지도 못하는듯 하여 그렇게 가져다 먹이곤해요.
아부지!
어릴때 섬에서 굴이나 농산물이나 해산물을 팔러오시던 그분들이 얼마나 싫었는지.....
한번 다녀가시면 이를 퍼트리고 겨우 죽을 꿇여 먹을라치는데 들이닥치시면
물을 한대접 더 부어 꿇여먹으며 불평을 하던 저에게 아부진 그러셨지요.
사람집에 사람이 꿇어야 잘 산다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 잘 사는것이냐고 했더니 내 대에는 이리살아도
너희 대는 이보다 더 잘살것이라 하시던 말씀이 요즘 아주 실감이 납니다.
성철이가 좀 힘들긴 하지만 그아이의 팔자거니 하며 그래도 이렇게 우리
형제들이 살수있는것이 아버지나 엄마의 덕 쌓으심이지 합니다.
아부지!
아부지 대폿집에 가셔서 시골에서 갓 올라온 처녀들이 있으면 아버진 무조건
집으로 데려 오신것 기억하세요?
저는 생각이 나요. 그중에도 한 언니가 며칠있다 큰언니 책을 가지고 도망간것.
이제 생각하니 그 언니는 나쁜길로 안 빠졌을것 같애요.
책을 좋아했으니까.
그이외도 비록 가난했고 아버지께서 약주만 드시면 주사를 피셔서 늘 불안해하며
살았지만 두분의 마음이 저희들의 인성교육을 심어주신것이지요.
아부지!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의처증이 병이란것이여서 치료를 받으셨을수도 있는거였는데
그때는 무지로서 그저 아버지를 탓하기만 하고 미워했었지요.
아부지!
이제 고백합니다. 그동안 아버지를 마음으로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를.
막내가 언젠가 그러더군요. 신문에 남매가 아버지를 죽인 그 심정을 이해한다고.
아마 우리 형제들은 그 심정을 다 이해할것인데 아버진 그런 저희들을
이해해 주실거예요.왜냐면?
아버진 늘 입버릇처럼 그러셨거든요.
내가 죽어야 너희들이 편하게 살텐데..... 라고.
병이여서 그러셨을것인데 저희들은 그렇게 생각할수가 없었지요.
정말 아버지 돌아가시고 저희들 편하게 살았었어요.
그런데 엄마가 제일 편하실줄 알았는데 엄마는 그런 말씀 잘 하셨어요.
그래도 느애비가 더 나았다고.
느애비는 그 병만 아니였으면 내가 하고자 하거나 시키면 너희들보다
더 수월했다며 그리워 하셨어요.
아버지가 엄마를 얼마나 예뻐하셨는지는 저는 그때도 알았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표현이 서투셨을까하고.
그런데 아부지 김서방이 아버지과예요.
욱하는 성질을 빼면 자상하고 인자하고 한없이 여린사람이 표현방법도
어찌나 그리 거친지.....
딸이 많으면 엄마의 운명을 닮는 딸이 있다는 설이 있어 그중에 제가
그딸이지 싶어 그래도 엄마의 삷보다는 나은 나의 삶이구나 위안을 하며 산답니다.
언제가 제가 한국에 갔을때 네자매가 막내가 운전하고 하룻밤 여행을 가며
시대적으로 각기 다른 어린시절을 이야기하며 웃고 울고 하던 시간에
큰언니가 엄마가 언니를 떼놓고 배를 타고 떠나던 그순간이 이제는
그때 엄마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해가 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지금도 제가슴에서 떠나지를 않네요.
엄마가 정말 힘들었을텐데 그래도 아버지께서 그런 큰언니를
아껴주시고 배려를 해 주시어 엄마가 덜 아프셨을거에요.
지난번 막내의 큰아이 결혼식에도 하서방가족보다 송서방가족이 더 많은듯해서
아버지의 배려가 오래동안 이어지는구나 하는 마음이 기뻤어요.
정환이 오빠를 비롯하여 두어테이블에 모여 앉아 이 덜렁이 정자를 얼마나
반기던지요.
아버지 큰언니에게 물은적이 있어요.
언니 우리 아버지 같으신 분 없지?
그래 아버지 같으신분 없지.그런데 엄마를 힘들게 하신것은 너무 하셨어. ㅋㅋㅋ
지금도 전 아버지 같으신 분 본적이 없어요.
전남편의 딸을 제자식들 제쳐놓고 단 둘밖에 없는 방하나를 큰언니에게 내주고
일곱식구가 한방에서 지내던 그 시절.
행여 언니공부에 방해가 될까 늘 입에 손가락을 대시고 쉬하며 조용하라 하시던.
언니의 친척이란 친척은 다 드나들어도 불평하시지 않고 받아주시던 아버지.
명절이 되면 소고기가 안되면 돼지고기 한근이라도 들려 저희들을 큰댁에
보내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덕으로 저희들 지금 잘 살고 있어요.
아버지 지금은 엄마 잘 모시고 다니시지요?
거기선 엄마가 의족을 하시지 않으셔도 되지 아프시다 하시지도 않을테니
잘 보살피세요. 그렇게 하실 따뜻한 아버지 전 믿어요.
엄마 아부지!
또 이야기가 있어요.
잘 됐으면 지금쯤 필립핀을 간다고 설레일텐데 막내가 요즘 필립핀에서
한국인들이 표적이라며 불안하다고 가지 말라고하여 안 가거든요.
회사에 필립핀 친구가 잇는데 성격이 괴팍하여 동료들간에는
눈총을 받는 친구인데 저에게는 아주 잘해요.
색시도 맛있는거 만들면 남편에게 들려 제게 보내주곤 하는데
그들을 저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함께 해주는것이
필립핀고향이 가난하다고 일년에 몇박스씩 헌옷이라던지 학용품이라던가
캔음식을 사 모았다가 한꺼번에 보내곤 하여 근배네나 진경이들이
내어놓는 아이들 옷가지나 선물을 받거나 안쓰는 소소한것들을 저도
모았다 주곤 하는데 너무 예쁘지 않나요?
그런 친구어머님이 구순을 맞아 간다기에 따라가려했거든요.
그래 간다하다 못가기에 미안하여 어제 카드에 $100 짜리 하나를 넣고
카드에 한글로 어머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쓰고 친구내외에겐
$20짜리 두개와 행운이라는 $ 2짜리를 다른 카드에 넣어 주었더니
일부러 회사에 다시 들어와 꼭 껴안아주고 갔어요.
어머니께서 우실거라고. 너같은 사람은 처음이라며.
돌아오는길에 한국에 잠간 호텔에 묵게 된다하여 막내에게 갈수있으며
가 만나 한식을 사주라 하려고요.
엄마.아부지.
막내가 지난번에 뉴욕에 왔었는데 혼자 지하철 타고 나가 커피도 얻어 마시고
길도 물어 잘 다녀 들어왔다네요.
생각나세요?새벽에 일어나 직장 가기전 영어배운다며 다니던 열정.
이제 빛을 보나봐요. 두녀석 유학 뒷바라지 하느라 수고하지만
조서방의 근면과 건실함이 감당을 해가며 이번에도 좋은 동네로 이사하고
지금쯤은 터키로 여행을 가느라 바쁠것이예요.
작은언니도 둘째놈이 그리 잘 한다네요. 저희들이 맛있는 고급 음식점을 다녀오면
언니랑 형부를 모시고 대접하고 여기저기여행도 함께 잘 모시고 다닌다네요.
아들이 여럿이면 딸같은 아들이 있다더니....
무엇보다 며느리들을 잘 맞이 했어요.
성철이가 걱정이지만 그렇게 살면서 이제는 제 취미생활을 하며 얼마전엔 전시회도
열었다네요.
벌써 환갑이잖우. 아들녀석이 가족모두를 불러 거하게 냈다는데 큰올케랑 두아이들도
왔었다는데 그 아이들이 잘 풀리지 않아 걱정인데 올케의 인품이 그렇게 되는듯하니
안타까워요.좀 푸근하면 좋을텐데....
엄마 아부지!
저희들 잘 살아내는것이지요?
아참 큰언니 역학공부하여 돈도 번데요.ㅎㅎㅎ
그런데 저는 언니에게 봐 달라고 안해요.
전 엄마아부지가 베푸신 덕으로 잘 살아낼거라는 믿음으로.
언니가 골골하여 늘 걱정이지만 그러면서도 아직도 학구열은 얼마나 대단한지.
역학을 배우면서도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성적이 늘 우위라네요.
그리고 노인들께 한글도 가르치러 다닌다며 일하는 저보다 더 바쁘다 한답니다.
엄마 아버지.
뵙고 싶어요. 그렇게 술을 드시는 아부지가 지긋지긋 했는데도 한국에 갈때마다
양주를 사들고 아버지가 계셨으면 우리 셋째딸이 사 왔다며 얼마나 기뻐하실텐데
하는 아쉬움이 늘 들어요.
엄마 아부지!
큰오빠랑 작은오빠 그리고 현주.그리고 큰형부 다 함께 만나시면
등 두드려 주시며 잘 지내세요.
힘든 시절만 보내시다 떠나가신 두분께 이렇게 잘 살아내고 남에게
손가락질 안 받으며 살아갈수있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신 두분 정말 감사 합니다.
그리고 아주 많이 많이 사랑합니다.
아 참!정자는 자식복도 많아 사랑 많이 받으며 잘 살고 있어요.
이크! 진경이가 가족여행으로 팜스피링으로 놀러간다고 공항에 데려다 달라 하여
가야해요.
사랑합니다 엄마 아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