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의 다락방

부모님의 기일

jj조약돌 2009. 4. 24. 14:34

동생이 그랬다. 엄마와 아버지의 기일이 음력으로 29일이면 한날이라고.

난 음력은 기억이 잘 안되여 양력만 기억이 되여 아버진 나의 결혼기념일인 5월 10일에 돌아가셨고

엄마는 5월 6일에 돌아가셔서 어버이날 장례를 치루어 신부님이 어머님의 은혜를 부르자하여

"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를 부르지도 못하며 얼마나 울었던지.....

 

아버진 남편이 먼저 미국을 가게 되니 엄마집 방하나를 내보내고 우리가 들어가 살던 어느날 밤에

안녕히 주무세요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들어와 잤는데 새벽에 엄마가 창문을 두드리시면서

아버지께서 풍을 맞으셨다며 부르셔 가보니 이미 아버진 말씀도 못하시고 멀건히 누워계신가 아닌가.

풍엔 한의원이 용하다 하여 왕진을 온 의사는 워낙 심하게 와 침도 안 들어간다며 우황청심환만

몇알 주고 돌아가고 그 당시 우리집과도 친하던 돌파리침쟁이겸 점쟁이 하시던 아저씨도 오셔서

보시더니 안되겠다 하시니 물론 돈이 있었다면 병원으로 모실수도 잇었겠지만 형편도 그러하고

두분이 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그냥 지켜보는수밖에 없었지.

 

아버진 식사도 미음도 넘기시지를 못하여 드시지를 못하시는데도 한손으로 자꾸 아래를 가르키시며

아프신 표정을 짓기에 보니 소변을 보시지 못하시니 방광이 눈에 보이게 봉긋봉굿 올라와 남편이 업고

인근 병원으로 모시고 가 소변을 빼고 다시 업고 오려니까 의사가 입원을 시키시란다.

내가 물었었지. 그러면 우리 아버지 고칠수 있느냐고?

아니란다. 허지만 내일 또 업고 와야한단다. 소변을 빼러.

또 올거라고. 우리엄마 초가삼간 하나 있는것 없어지면 안된다고.

도둑놈 심보지.오줌 빼자고 입원을 시키래.

그렇게 돌아오면서 투덜은 댔지만 참 마음이 아팠고 나도 참 독한년이구나 했지.

다행히 동생이 군에서 해봤다며 기구를 사다 소변을 받아내며 난 아버지거시기도 만져 본 딸년이지.

 

그렇게 물조차 넘기시지 못하고 보름만에 가셨다. 이웃아주머니들이 손톱을 보아 검어지면 곧 돌아가실거라

하기도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으면 곧 가실거라고 하여 해보니 정말 아버진 그렇게 변해가시고 있었다.

포기를 하고 초상을 치룰 준비로 그릇들을 수도가에서 씻는데 엄마가 조용히 부르시기에 들어가니 이미

아버진 돌아가셨다. 몸이 불편한 엄마가 옷을 갈아입히신다며 도우라 하는데 그 자리에서 아줌마들이

아버지 수의를 딸이 입히면 안된다고 하지 말라 했다 하니 엄마는 그럼 너는 언니에게 전화하고 동생들에게도

알리라고 하시어 뛰여나가며 터지는 울음은 아버지보다 내게 안 좋다고 하는 그 생각만 하는 내 자신이 더

미워 나오는 울음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여 아버지는 67년을 사시고 가셨다.

누구나 운명이란것을 타고 태어난다고 믿는 나는 운명론자인편이지 싶다.

그래도 아버지의 삶은 운명으로 돌리기에도 어렵게 사신 분이시다.

 

엄마는 97년도 5월 4일 일요일 아침 성당에 가려고 나서는데 동생에게 전화가 와 병원에 계시는데 산소호흡기를 달고 계시며 떼기만 하면 돌아가신다고 한다.

안돼 나 갈때까지 떼지마 해 놓고 옷도 벗고 낚시 간 남편과 의논도 없이 비행기표를 알아보았다.

일요일이라 여행사들이 문을 닫아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여 그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와 새벽3시에 뜨는 비행기가 있어 부랴부랴 음식 몇가지를 해놓고 직장에 나가야하는 딸아이더러 내가 운전을 할테니 너는 자거라

하고 운전을 하는데 눈을 뜨고도 잔다는 말이 실감이 나게 지그재그로 운전이 되는게 아닌가.

놀란 딸아이가 마~암~ 하네.

하루종일 먹지도 못하고 있다 비행기를 기다리자니 배가 고파진다. 사람의 몸은 마음과는 참 다르더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김밥을 가지고 와 먹기도 하더만.

 

그렇게 도착하여 병원으로 들어가니 마침 신부님과 수녀님이 종부성사를 주시고 나오시고 계셔 인사만 하고

들어가려니 면회시간이 아니여 안된단다. 미국에서 왔다고 잠시만 뵙자고 해도 안된단다.세상에.

그때처럼 의사나 간호원 아니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냉혈인이란것을 느낀적이 없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대기실로 가 면회시간까지 기다려 가보니 평소에 대인관계가 좋던 엄마를 뵈러온 친지친구분들이 줄을 서 기다리니 누군가 그런다 맨나중에 들어가라고 그러면 시간이 좀 있지 않겠느냐고.

슬립퍼와 가운을 릴레이식으로 받아 입어가며 잠간씩 뵙고 나와 내 차례.

그러나 겨우 엄마 부르고 묵주를 엄마손에 쥐여 드리고 나니 나가란다. 세상에.

미국에서 온 딸이라고 좀 더 있으면 안되느냐고 사정을 해도 규칙이라며 나가라 한다.

 

가족회의를 하여 산소호흡기을 떼느냐 마느냐의 서로가 눈치만 보기에 내가 그랬다. 떼자고.

나 장례식까지 치루고 가겠다고. 또 못 온다고.

남동생이 제일 힘들어 하기에 내가 나섰었다.

그리고 막내이모께 여쭈었다. 자식인 우리들은 결정이 힘드니 이모가 결정을 내려달라고.

이모가 떼거라 해 주셔 그리 하자니 이젠 병원측에서 안된단다. 병원에선 안되고 집으로 모시고

뗄수는 있는데 의사가 따라가 떼고 한시간안에 안 돌아가시면 의사는 돌아가고 나중에 돌아가시면

영안실로 모셔야 한다니 돌아가시고 나 다시 모시고 내려올때 에러배터로 못 내려오신다 하니 어쩌냐구.

또 한가지 방법은 병원에 슬픔위안실이 있는데 거기로 모셔서 링겔을 빼고 기다려 본다는것이다.

엄마는 링겔에 의지해 겨우 숨만 쉬시는것이기 때문인것이다.

그렇게 하기로 하고 엄마를 따라 들어가 15분도 안되여 엄마의 맥을 마구 떨어지는것이 아닌가.

다 꾾어지기도 전에 여자들은 나가라 하여 나왔더니 형부들이랑 동생도 곧 따라나오더니 영안실로

가셨단다.너무 힘들어 하는 나를 언니들과 이모가 언니집에가 좀 자라하기에 들어가 누웠는데

사촌언니가 전화를 하여 받았더니 너 왜 집에 있느냐 하며 잠이 오느냐고 난리다.

 

그렇게 해서 장례를 모시고 나니 동생이 부조금 들어온것 이것저것 다 제하고 남았다며 20만원씩인가를

나누어 준다.난 일요일이여서 은행도 못가고 현금인출기에서 하루 뺄수있는 금액이 $200 이라 남편과

딸아이가 빼 준 $ 400 만 들고 가고 남편이 부친다고 했다하니 막내가 기다리라고 하여 한푼도 내 놓지도

않았는데 도리여 받은것이다. ㅎㅎㅎ 결국은 울엄마의 유산인셈이지.

장례식엔 조의금을 가족이 함께 받아 장례비용에 쓴다는것을 난 모르고 잇엇던것이였는데 형제가 여럿이니

남았다며 준 것이 지금도 얼마나 웃으운지 모른다.

나중에 알게 된 나의 친구 몇몇이 준 조의금은 내놓지 않앗으니 난 좀 더 유산을 받은셈이지.

 

그렇게 지낸 두분이 기일이 음력으로 하루 차이가 나 제사도 한날 지낸다고 한다.

이번엔 29일이 내일이다. 일요일 성당에 가 연미사를 드려드리려고 한다.

 

장례를 치루면서 막내가 그랬다. 이제는 고아라고. 어느덧 고아가 된지 12년이네.

아버지, 엄마 잘 모시고 다니시지요?

엄마, 이제 의족 없으셔도 잘 걸으시고 아프시지 않으시지요?

아버지, 좀 더 사셨으면 그렇게 이뻐하시던 셋째딸이 미국에도 모시고 오고 양주도 사 드렸을텐데....

아범이 가끔 한번씩 그러네요.

하느님은 인간의 죽음을 잘 못 만드셨다고.

왜 한번 가시면 전화도 편지도 하지 않느냐고.요즘은 이메일도 되는데.....

엄마, 명절때만 되면 이젠 전화 할때가 없어 엄마가 더 보고 싶어요.

엄마가 늘 그러셨잖아요. 맛난것 많이 한다 먹으러 오렴. 하시던 목소리가 들리는듯 해요.

 

그래도 두분이 나란히 계셔 덜 외로우시라 생각하니 덜 슬퍼요.

아버지 엄마 많이 돌봐 주셔야해요. 난 알아요. 아버지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 하셨는지..

표현방법이 옳지 않았지만 전 알고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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